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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게/문정희 아들에게/문정희 아들아 너와 나 사이에는 신이 한 분 살고 계시나보다 ​ 왜 나는 너를 부를 때마다 이토록 간절해지는 것이며 네 뒷모습에 대고 언제나 기도를 하는 것일까? ​ 네가 어렸을 땐 우리 사이에 다만 아주 조그맣고 어리신 신이 계셔서 ​ 사랑 한 알에도 우주가 녹아들곤 했는데 ​ 이제 쳐다보기만 해도 훌쩍 큰 키의 젊은 사랑아 ​ 너와 나 사이에는 무슨 신이 한 분 살고 계셔서 이렇게 긴 강물이 끝도 없이 흐를까? #신이이어주고 #신이지켜주는 #어머니와아들 2024. 4. 6.
아버지의 성기를 노래하고 싶다/이승하 아버지의 성기를 노래하고 싶다/이승하 볼품없이 누워 계신 아버지 차갑고 반응이 없는 손 눈은 응시하지 않는다 입은 말하지 않는다 오줌의 배출을 대신해주는 도뇨관(導尿管)과 코에서부터 늘어져 있는 음식 튜브를 떼어버린다면? 항문과 그 부근을 물휴지로 닦은 뒤 더러워진 기저귀 속에 넣어 곱게 접어 침대 밑 쓰레기통에 버린다 더럽지 않다 더럽지 않다고 다짐하며 한쪽 다리를 젖히자 눈앞에 확 드러나는 아버지의 치모와 성기 물수건으로 아버지의 몸을 닦기 시작한다 엉덩이를, 사타구니를, 허벅지를 닦는다 간호사의 찡그린 얼굴을 떠올리며 팔에다 힘을 준다 손등에 스치는 성기의 끄트머리 진저리를 치며 동작을 멈춘다 잠시, 주름져 늘어져 있는 그것을 본다 내 목숨이 여기서 출발하였으니 이제는 아버지의 성기를 노래하고 싶다.. 2024. 4. 6.
반쯤 깨진 연탄/안도현 반쯤 깨진 연탄/안도현 언젠가는 나도 활활 타오르고 싶은 것이다 나를 끝 닿는데 까지 한번 밀어붙여 보고 싶은 것이다 타고 왔던 트럭에 실려 다시 돌아가면 연탄, 처음으로 붙여진 나의 이름도 으깨어져 나의 존재도 까마득히 뭉개질 터이니 죽어도 여기서 찬란한 끝장을 한번 보고 싶은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뜨거운 밑불위에 지금은 인정머리없이 차가운, 갈라진 내 몸을 얹고 아랫쪽부터 불이 건너와 옮겨 붙기를 시간의 바통을 내가 넘겨 받는 순간이 오기를 그리하여 서서히 온몸이 벌겋게 달아 오르기를 나도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나도 보고 싶은 것이다 모두들 잠든 깊은 밤에 눈에 빨갛게 불을 켜고 구들장 속이 얼마나 침침하니 손을 뻗어 보고 싶은 것이다 나로 하여 푸근한 잠 자는 처녀의 등허리를 밤새도록 슬금슬금.. 2024. 4. 5.
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최치언 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최치언 우울한 날에는 당나귀처럼 설탕을 씹으세요 찬장을 뒤져서라도 설탕을 찾으세요 빠른 길은 동네 슈퍼에 가면 돼요 젖은 두루마리 화장지 같은 주인에게도 설탕을 권하세요 보건청에서 나온 사람처럼 잔뜩 뒷짐을 지고 아! 하면 아! 하세요 그럼 희망을 넣어드리지요 하세요 시든 장미꽃에게도 설탕물을 주세요 썩은 이빨 사이에 설탕을 솜처럼 끼고 웃으세요 자 저를 따라 해보세요 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 간혹, 불행이 불행을 치료할 수 없듯 설탕은 설탕의 중독을 치료할 수 없답니다 - 하는 이들이 있는데 꿀벌이 침도 가지고 있다고만 생각하세요 그것으로 인하여 퉁퉁 부르튼 날엔 또 설탕을 먹으세요 설탕이 없는 날엔 당나귀에게 조금 빌려보세요 당나귀 나라의 말로 정중하게 한 .. 2024. 4. 5.
엄마 걱정/기형도 엄마 걱정/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 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2024. 4. 5.
봄비가 오지 않길 바랐어/전유종 봄비가 오지 않길 바랐어/전유종 중학교 입학식 봄비가 차갑게 내린 날이었어 하굣길 깜박 잠드신 할머니 데리러 오지 못해 학교에 혼자 남아 기다린 적이 있었는데 다른 기억들은 전부 하늘에 올려놓으셨는데 이 기억은 떠나는 날까지 붙들고 사셨어 봄비가 내릴 무렵에는 항상 학교 앞에 계셨거든 구멍 난 기억과 우산을 들고 내 얼굴도 모르는 할머니를 보며 난 그저 더 이상 봄비가 내리지 않길 바랐어 #교도소 수용자가 쓴 시와 동시사이 #치매를 앓게 된 할머니의 모든 기억은 사라졌는데 #손자에게 우산을 갖다 주지 못한 기억만은 뇌리에 박혀 #봄비가 내리면 늘 구멍 난 기억과 우산을 들고 학교 앞으로 간다 #감동과 눈물이 봄비처럼 2024.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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