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전체 글23 뼉다귀집/김신용 양동시편 2 -뼉다귀집/ 김신용 뼉다귀집을 아시는지요 지금은 헐리고 없어진 양동 골목에 있었지요 구정물이 뚝뚝 듣는 주인 할머니는 새벽이면 남대문 시장바닥에서 줏어온 돼지뼈를 고아서 술국밥으로 파는 술집이었지요 뉘 입에선지 모르지만 그냥 뼉다귀집으로 불리우는 그런 술집이지만요 어쩌다 살점이라도 뜯고 싶은 사람이 들렀다가는 찌그러진 그릇과 곰팡내 나는 술청 안을 파리와 바퀴벌레들이 거미줄의 현을 고르며 유유롭고 훔친 자리를 도리어 더럽힐 것 같은 걸레 한 움큼 할머니의 꼴을 보고는 질겁을 하고 뒤돌아서는 그런 술집이지만요 첫새벽 할머니는 뼉다귀를 뿌연 뼛물이 우러나오도록 고아서 종일토록 뿌연 뼛물이 희게 맑아질 때까지 맑아진 뼛물이 다시 투명해질 때까지 밤새도록 푹 고아서 아침이 오면 어쩌다 붙은 살점까지.. 2024. 4. 4. 반성하다 그만둔 날/김사이 반성하다 그만둔 날/김사이 처음 만난 사람들 속에서 술을 마신다 말을 새로 배우듯 조금씩 취해가며 자본가와 노동자를 얘기하다가 비정규직 부당해고에 분개를 하고 여성해방과 성매매를 말하며 반짝이는 눈동자들 틈에 입으로만 달고 다닌 것 같은 시가 길을 헤매며 주섬주섬 안주만 챙긴다 엉거주춤 따라간 나이트클럽에 취해 돌아보니 얼큰히 달아오른 얼굴들이 흐물거리고 춤을 추는 무대 위엔 노동자도 자본가도 없다 신나게 흔들어대는 사람들만 있다 찝쩍대고 쌈박질하고 홀로 비틀어대는, 아주 빠르게 회전하는 형형색색의 불빛들 아래 조금씩 젖어가며 너나없이 한 덩어리가 되어 출렁거린다 낯선 이국땅에 총 맞아 죽고 굶어 죽어도 매일 밤 일탈의 유혹처럼 찾아드는 이 자본의 꿀맛 도처에 흔들리는 일상들 등급 매기지 않기로 했다 2024. 4. 3. 수선화에게/정호승 수선화에게/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의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2024. 4. 3. 밥상 이야기/황정희 밥상 이야기/황정희 둘째 가졌을 무렵입니다 하루는 장 보러 나갔다가 왜 그리 칼국수가 먹고 싶던지요 층층시하 먹고 싶은 것 따로 챙길 여유 없던 시절 난데없는 칼국수 생각 참 난감했습니다 배 속 아이는 여전히 칭얼대고 좁은 시장통에 서서 한참 머뭇거리다 칼국숫집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바지락 칼국수 한 그릇 시켰습니다 배 속 아이는 얌전히 기다리고 문밖 소음도 저만큼 물러났습니다 무심코 앉았는데 주방에서 호박 써는 소리 마늘 다지는 소리 냄비 뚜껑 여닫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 누군가 내 밥상을 차리고 있었습니다 문득 몇 해 동안 한 번도 밥상을 받아보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삼시 세끼 새로 지은 밥에 국에 나물에 밥상을 차려 내면서도 나는 늘 귀퉁이에서 허겁지겁 끼니를 때우는 밥 하는 여자였습니다.. 2024. 4. 3. 봄밤/권혁웅 봄밤/권혁웅 전봇대에 윗옷 걸어두고 발치에 양말 벗어두고 천변 벤치에 누워 코를 고는 취객 현세와 통하는 스위치를 화끈하게 내려버린 저 캄캄함 혹은 편안함 그는 자신을 마셔버린 거다 무슨 맛이었을까? 아니 그는 자신을 거기에 토해놓은 거다 이번엔 무슨 맛이었을까? 먹고 마시고 토하는 동안 그는 그냥 긴 관管이다 그가 전 생애를 걸고 이쪽저쪽으로 몰려다니는 동안 침대와 옷걸이를 들고 집이 그를 마중 나왔다 지갑은 누군가 가져간 지 오래, 현세로 돌아갈 패스포트를 잃어버렸으므로 그는 편안한 수평이 되어 있다 다시 직립인간이 되지는 않겠다는 듯이 부장 앞에서 목이 굽은 인간으로 다시 진화하지 않겠다는 듯이 봄밤이 거느린 슬하, 어리둥절한 꽃잎 하나가 그를 덮는다 이불처럼 부의 봉투처럼 권혁웅시인 - "시는 사.. 2024. 4. 2. 멸치/김기택 멸치 /김기택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이 쉬고 있는 바닷속멸치 지느러미의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 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냈던 것이다 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남아 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갔던 것이다 모래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 건어물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잡히는 이 멸치에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이 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2024. 4. 2. 이전 1 2 3 4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