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좋은시17 밥상 이야기/황정희 밥상 이야기/황정희 둘째 가졌을 무렵입니다 하루는 장 보러 나갔다가 왜 그리 칼국수가 먹고 싶던지요 층층시하 먹고 싶은 것 따로 챙길 여유 없던 시절 난데없는 칼국수 생각 참 난감했습니다 배 속 아이는 여전히 칭얼대고 좁은 시장통에 서서 한참 머뭇거리다 칼국숫집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바지락 칼국수 한 그릇 시켰습니다 배 속 아이는 얌전히 기다리고 문밖 소음도 저만큼 물러났습니다 무심코 앉았는데 주방에서 호박 써는 소리 마늘 다지는 소리 냄비 뚜껑 여닫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 누군가 내 밥상을 차리고 있었습니다 문득 몇 해 동안 한 번도 밥상을 받아보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삼시 세끼 새로 지은 밥에 국에 나물에 밥상을 차려 내면서도 나는 늘 귀퉁이에서 허겁지겁 끼니를 때우는 밥 하는 여자였습니다.. 2024. 4. 3. 봄밤/권혁웅 봄밤/권혁웅 전봇대에 윗옷 걸어두고 발치에 양말 벗어두고 천변 벤치에 누워 코를 고는 취객 현세와 통하는 스위치를 화끈하게 내려버린 저 캄캄함 혹은 편안함 그는 자신을 마셔버린 거다 무슨 맛이었을까? 아니 그는 자신을 거기에 토해놓은 거다 이번엔 무슨 맛이었을까? 먹고 마시고 토하는 동안 그는 그냥 긴 관管이다 그가 전 생애를 걸고 이쪽저쪽으로 몰려다니는 동안 침대와 옷걸이를 들고 집이 그를 마중 나왔다 지갑은 누군가 가져간 지 오래, 현세로 돌아갈 패스포트를 잃어버렸으므로 그는 편안한 수평이 되어 있다 다시 직립인간이 되지는 않겠다는 듯이 부장 앞에서 목이 굽은 인간으로 다시 진화하지 않겠다는 듯이 봄밤이 거느린 슬하, 어리둥절한 꽃잎 하나가 그를 덮는다 이불처럼 부의 봉투처럼 권혁웅시인 - "시는 사.. 2024. 4. 2. 멸치/김기택 멸치 /김기택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이 쉬고 있는 바닷속멸치 지느러미의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 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냈던 것이다 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남아 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갔던 것이다 모래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 건어물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잡히는 이 멸치에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이 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2024. 4. 2. 봄길 / 정호승 봄길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있는 사람이 있다 모순같은 진리가 파장을 일으킨다 봄길은 희망이다 이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은 봄길 2024. 3. 29.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 2024. 3. 29. 이전 1 2 3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