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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시17

반쯤 깨진 연탄/안도현 반쯤 깨진 연탄/안도현 언젠가는 나도 활활 타오르고 싶은 것이다 나를 끝 닿는데 까지 한번 밀어붙여 보고 싶은 것이다 타고 왔던 트럭에 실려 다시 돌아가면 연탄, 처음으로 붙여진 나의 이름도 으깨어져 나의 존재도 까마득히 뭉개질 터이니 죽어도 여기서 찬란한 끝장을 한번 보고 싶은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뜨거운 밑불위에 지금은 인정머리없이 차가운, 갈라진 내 몸을 얹고 아랫쪽부터 불이 건너와 옮겨 붙기를 시간의 바통을 내가 넘겨 받는 순간이 오기를 그리하여 서서히 온몸이 벌겋게 달아 오르기를 나도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나도 보고 싶은 것이다 모두들 잠든 깊은 밤에 눈에 빨갛게 불을 켜고 구들장 속이 얼마나 침침하니 손을 뻗어 보고 싶은 것이다 나로 하여 푸근한 잠 자는 처녀의 등허리를 밤새도록 슬금슬금.. 2024. 4. 5.
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최치언 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최치언 우울한 날에는 당나귀처럼 설탕을 씹으세요 찬장을 뒤져서라도 설탕을 찾으세요 빠른 길은 동네 슈퍼에 가면 돼요 젖은 두루마리 화장지 같은 주인에게도 설탕을 권하세요 보건청에서 나온 사람처럼 잔뜩 뒷짐을 지고 아! 하면 아! 하세요 그럼 희망을 넣어드리지요 하세요 시든 장미꽃에게도 설탕물을 주세요 썩은 이빨 사이에 설탕을 솜처럼 끼고 웃으세요 자 저를 따라 해보세요 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 간혹, 불행이 불행을 치료할 수 없듯 설탕은 설탕의 중독을 치료할 수 없답니다 - 하는 이들이 있는데 꿀벌이 침도 가지고 있다고만 생각하세요 그것으로 인하여 퉁퉁 부르튼 날엔 또 설탕을 먹으세요 설탕이 없는 날엔 당나귀에게 조금 빌려보세요 당나귀 나라의 말로 정중하게 한 .. 2024. 4. 5.
엄마 걱정/기형도 엄마 걱정/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 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2024. 4. 5.
봄비가 오지 않길 바랐어/전유종 봄비가 오지 않길 바랐어/전유종 중학교 입학식 봄비가 차갑게 내린 날이었어 하굣길 깜박 잠드신 할머니 데리러 오지 못해 학교에 혼자 남아 기다린 적이 있었는데 다른 기억들은 전부 하늘에 올려놓으셨는데 이 기억은 떠나는 날까지 붙들고 사셨어 봄비가 내릴 무렵에는 항상 학교 앞에 계셨거든 구멍 난 기억과 우산을 들고 내 얼굴도 모르는 할머니를 보며 난 그저 더 이상 봄비가 내리지 않길 바랐어 #교도소 수용자가 쓴 시와 동시사이 #치매를 앓게 된 할머니의 모든 기억은 사라졌는데 #손자에게 우산을 갖다 주지 못한 기억만은 뇌리에 박혀 #봄비가 내리면 늘 구멍 난 기억과 우산을 들고 학교 앞으로 간다 #감동과 눈물이 봄비처럼 2024. 4. 4.
뼉다귀집/김신용 양동시편 2 -뼉다귀집/ 김신용 뼉다귀집을 아시는지요 지금은 헐리고 없어진 양동 골목에 있었지요 구정물이 뚝뚝 듣는 주인 할머니는 새벽이면 남대문 시장바닥에서 줏어온 돼지뼈를 고아서 술국밥으로 파는 술집이었지요 뉘 입에선지 모르지만 그냥 뼉다귀집으로 불리우는 그런 술집이지만요 어쩌다 살점이라도 뜯고 싶은 사람이 들렀다가는 찌그러진 그릇과 곰팡내 나는 술청 안을 파리와 바퀴벌레들이 거미줄의 현을 고르며 유유롭고 훔친 자리를 도리어 더럽힐 것 같은 걸레 한 움큼 할머니의 꼴을 보고는 질겁을 하고 뒤돌아서는 그런 술집이지만요 첫새벽 할머니는 뼉다귀를 뿌연 뼛물이 우러나오도록 고아서 종일토록 뿌연 뼛물이 희게 맑아질 때까지 맑아진 뼛물이 다시 투명해질 때까지 밤새도록 푹 고아서 아침이 오면 어쩌다 붙은 살점까지.. 2024. 4. 4.
반성하다 그만둔 날/김사이 반성하다 그만둔 날/김사이 처음 만난 사람들 속에서 술을 마신다 말을 새로 배우듯 조금씩 취해가며 자본가와 노동자를 얘기하다가 비정규직 부당해고에 분개를 하고 여성해방과 성매매를 말하며 반짝이는 눈동자들 틈에 입으로만 달고 다닌 것 같은 시가 길을 헤매며 주섬주섬 안주만 챙긴다 엉거주춤 따라간 나이트클럽에 취해 돌아보니 얼큰히 달아오른 얼굴들이 흐물거리고 춤을 추는 무대 위엔 노동자도 자본가도 없다 신나게 흔들어대는 사람들만 있다 찝쩍대고 쌈박질하고 홀로 비틀어대는, 아주 빠르게 회전하는 형형색색의 불빛들 아래 조금씩 젖어가며 너나없이 한 덩어리가 되어 출렁거린다 낯선 이국땅에 총 맞아 죽고 굶어 죽어도 매일 밤 일탈의 유혹처럼 찾아드는 이 자본의 꿀맛 도처에 흔들리는 일상들 등급 매기지 않기로 했다 2024.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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