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의 넓이/이문재
해가 뜨면
나무가 자기 그늘로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종일 반원을 그리듯이
혼자도 자기 넓이를 가늠하곤 한다
해 질 무렵이면 나무가 제 그늘을
낮게 깔려오는 어둠의 맨 앞에 갖다놓듯이
그리하여 밤새 어둠과 하나가 되듯이
우리 혼자도 서편 하늘이 붉어질 때면
누군가의 안쪽으로 스며들고 싶어한다
너무 어두우면 어둠이 집을 찾지 못할까 싶어
밤새도록 외등을 켜놓기도 한다
어떤 날은 어둠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유리창을 열고 달빛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그러다가 혼자는 자기 영토를 벗어나기도 한다
혼자가 혼자를 잃어버린 가설무대 같은 밤이 지나면
우리 혼자는 밖으로 나가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제 그림자를 찾아오는 키 큰 나무를 바라보곤 한다
<정지용문학상의 심사평>
올해의 “지용”을 뽑는 자리에 왔으니 관주(貫珠)하기 어려운 것은 몰려 들어온 가집(佳什)들이 난형난제라. 어두운 눈 밝혀 읽고 또 읽으매 이문재 시인의 “혼자의 넓이”가 오래 다듬어 온 생각의 깊이와 넓이를 한 편의 시로 조탁(彫琢)해 낸 솜씨가 한국시를 한 단계 높이고 있지 않은가. 이근배(시인,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이제는 한국의 대표적인 문학상 가운데 하나로 우뚝한 정지용문학상은 제33회 수상자로 이문재 시인의 ‘혼자의 넓이’를 선정했습니다. ‘혼자의 넓이’는 아름다운 서정시입니다. 그러면서도 깊은 인식과 섬세한 감각을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낭송하기 좋은 시여야 한다는 정지용문학상의 선정 취지에도 어울리는 작품입니다. 유자효(시인, 지용회장)
이문재 시인의 <혼자의 넓이>를 수상작으로 정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문명과 삶에 대해 불안과 우려를 보내는 시인은 나무가 제 그늘을 그리듯이 다가오는 어둠과 존재의 고독을 자기만의 언어로 투시하고 있다. 일찍이 새 감각과 지식으로 시세계를 확대해 간 정지용의 시정신이 더욱 활달하게 펼쳐지기를 기원하며 금년도 이문재 시인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문정희(시인)
2021년에는 이문재의 「혼자의 넓이」를 만날 수 있었다. 이것은 “종일 반원을 그리”다가 어둠의 무한과 섞이는 나무의 일상과 동일성을 지닌다. 세상의 모든 혼자들이 우주적 자아이다. 혼자에 대한 직시가 우주적 존재성에 대한 발견이 되고 있다. 시적 정조가 고요하고 나직하면서도 크고 높은 무한의 세계를 끌어안고 있다. 홍용희(문학평론가)
이문재의 시가 걸어온 길은 사는 일과 무관한 추억이나 이상 세계를 그려내지 않았고 빤한 현실 비판에 접근하지 않았다. 양편 바깥의 한 작은 꼭짓점을 이루면서 외로웠다. 어쩌면 그 결과가 ‘혼자의 넓이’를 발견해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지용 시에 등장하는 별 밝은 칠흑 어둠에 맥락이 닿겠다 싶어 인연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본다. 장석남(시인)
1회 수상자 박두진 시인 이후 김광균, 박정만, 오세영, 이가림, 이성선, 이수익, 이시영, 오탁번, 유안진, 송수권, 정호승, 김종철, 김지하, 유경환, 문정희, 유자효, 강은교, 조오현, 김초혜, 도종환, 이동순, 문효치, 이상국, 정희성, 나태주, 이근배, 신달자, 김남조, 김광규, 문태준, 장석남 시인이 수상의 영예를 누렸다.